작성 : 이홍기(http://blog.daum.net/zzang2314274)
DOS를 처음으로 접했던 것은 초등학교 때였던 것 같은데 몇 학년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당시 초등학교엔 컴퓨터실이 두 개가 있었는데 2층은 최신식답게 윈도 95가 깔려 있었고 4층은 DOS가 깔려 있었다. 헌데 2층은 수업을 위해서 그런지 게임이 안 깔려 있었고 4층은 모조리 치우고 다른 용도로 쓸 예정이어서 그랬는지 게임이 잔뜩 깔려 있었다. 어짜피 내다 버릴 거라 딱히 관리를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그 많은 게임은 대체 누가 깔았는지 지금도 궁금하다.
오락실이 게임을 '재미의 수단'으로 여긴 공간이라면, 컴퓨터실의 DOS는 게임을 '문화의 수단'으로 여긴 공간이었던 것 같다. 물론 당시의 윈도 95나 98도 경우에 따라 DOS를 탑재한 곳이 많았기에 DOS게임들을 윈도에서도 즐길 수 있었다. 이 고전게임들은 오락실의 아케이드 게임과는 그래픽과 조작, 무엇보다 게임성이나 방향이 여러가지로 달랐는데 덕분에 게임에 대해 또 하나의 눈을 틔워주었다. 여기저기서 보고 해본 게임들 중에 기억나는 것을 꼽으라면...
- 페르시아의 왕자 1(브로드번드, 1989)
- 페르시아의 왕자 2: 그림자와 불꽃(브로드번드, 1993)
- 범피의 아케이드 판타지(로리시엘즈, 1992)
- 로터스 3: 얼티메이트 챌린지(그렘린 그래픽스, 1992)
오락실과 마찬가지로 이 외에도 더 있을 테고, 이후 집에 컴퓨터를 장만한 뒤에도 국내 사이트를 뒤져가며 DOS게임을 깔아서 했던 기억이 난다. 물론 바이러스 같은 것에 대해 별다른 대비를 하지 않다 보니 컴퓨터가 고장나기가 일쑤였지만. 게다가 내 취향에 맞다고 생각해서 검색한 게임을 막상 깔아서 해보니 취향과 달라 곧장 지운 적도 많은데, 아마 당시 게임의 본고장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이나 유럽의 게이머들도 그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나는 PC방이 점점 세를 불려 오늘날의 편의점마냥 여기저기 들어서면서 학생 게이머들을 진공청소기마냥 빨아들이든 말든, 점점 시대에 역행하는 사람이 되었다. 뭐 유행이라는 것은 언제나 존재했고, PC방에 몰려들었던 학생 게이머들을 비판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이 바닥에는 '취향입니다 존중해주시죠'라는 마법의 주문이 있으니까. 그저 내가 아직도 당시 PC방에 퍼진 게임에 매력을 느끼지 못했을 뿐이다. 돌이켜보면 내가 집보다 PC방을 더더욱 이용하게 된 건 천하제일상 거상(AK 인터랙티브, 2002)이 제정신(?)이었을 때, 그리고 카운터 스트라이크 온라인(넥슨, 2007)이 제정신(사실 이 때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이었을 때, 그리고 오버워치(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 2016)의 붐이 사그라들기 시작하는 무렵 막차에 탑승한 때였다. 결국엔 스타크래프트 이후로 나를 끝끝내 흡수하고 말았구나, 블리자드. 잘 했어요, 짝짝짝!
다만 나도 발전을 아주 안 한 것은 아니었다. DOS게임'만' 하는 것을 넘어 에뮬레이터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이다. 물론 문방구나 백화점에서 팔았던, 합팩과 다를 바 없는 게임 모음 CD란 것에 적잖이 '사기(!)'를 당하고 난 뒤였다. 잠깐 인터넷을 뒤지면 얼마든지 무료로 할 수 있었던 것을,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것도 아닌 남의 것을 팔아서 부를 착복한 것이다. 여기에 대해선 오락실이나 DOS게임보다 풀어낼 썰이 더 많으니 나중에 따로 글을 써 보겠다.
나도 모르게 해적질을 돕다, 불법 다운로드와 PC 게임
그 때는 그랬다. 정품을 사는 사람이 바보 취급을 받았고 정품을 사는 루트가 있는지도 몰랐다. 그 때는 그랬다. 정품을 사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없었고 모두가 파일노리와 프루나, 당나귀, 우리 집을 포함해 아파트 한 동을 감염시킨 오버넷(이 이름이었던가?), 등등의 P2P를 칭송하며 알리고 다녔다. 그 때는 그랬다. P2P 사이트에 가입해 포인트를 내는 것마저도 아깝게 여기는 사람들을 위해 분할압축으로 시간이 걸릴지언정 무료 다운로드를 제공한 사람들은 영웅 취급을 받았다. 그 때는 그랬다. 모두가 해적이었던 것이다.
불법 다운로드의 역사와 그 만행과 파급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기사와 특집에서 다뤘으니 생략하겠다. 그렇다고 있었던 일을 없었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그렇기에 이 일은 나를 포함한 대다수의 게이머들이 안고 가야 할 원죄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저 사실을 인정하되, 어떤 게임을 즐기고 어떤 점을 느꼈는지에 대해서만 집중하려고 한다. (불법 다운로드에 대한 경험은 역시 따로 글을 쓰겠다.)
불법 다운로드를 통해 접한 (엄청나게 많은!) 게임들 중에 인상깊은 것을 꼽으라면 역시 GTA 2(락스타 게임즈, 1999)가 아닌가 싶다. 그 게임은 여러가지로 나비효과라고 할 만한데 이렇게까지 노골적인 게임을 처음 봤고, 자세한 정보를 얻기 위해 GTA자료실이라는 커뮤니티에 가입했고, 그 과정에서 외국의 정보를 번역하면서 번역가 노릇을 처음으로 시작했고, 그걸 통해 다른 게임의 한글패치 작업에도 참여하면서 지금의 반푼이 번역가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불법 다운로드는 불법이지.
어쨌든 나는 불법 다운로드를 통해 세상에 수많은 게임들이 있으며 계속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우물 안 개구리가 우물 밖으로 나온 격이랄까. 그래서 비록 죄가 크고 죄값을 받아야 마땅할 불법 다운로드이지만, 나는 불법 다운로드에게 잠시나마 감사한다. 악마와 계약했단 소리를 들을지언정 게임계를 보는 눈을 한층 틔워 주었으니까. 어쩌면 고전게임계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면 고전게임 전문 번역가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지금도 종종 시간을 내서 텍스트가 많은 고전 어드벤처 게임의 번역을 돕고 있지만 말이다.
세상은 돌고 돌아 다시 고전으로, 인디 게임과 고전 게임
간격을 상당히 두고 쓰느라 앞뒤가 안 맞게 된 첫 번째 '오만한 생각'에서 정말로 말하고 싶었던 부분이다. 인디 게임을 처음으로 알게 된 계기가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몇몇 게임 전시회나 지스타에서 중소기업이나 대학생들이 만든 게임을 잠깐잠깐 접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변변찮은' 게임을 재밌게 했던 기억이 난다. 고전게임에 대한 향수 때문이었을까.
인디 게임을 공식적으로 접했던 것은 2016년 BIC, 즉 부산 인디 커넥트 페스티벌이었다. 처음에는 이전에 알고 있었던 번역회사의 이사님께 인사를 드리고 게임번역에 대해 조언을 구할까 했을 뿐이었는데, 거기서 인디 게임의 정의에 부합하는 게임들을 보고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그들의 개발 환경이나 마인드는 고전게임과 놀랍도록 흡사했다. 제로(0)에서 시작하는 개발 환경, 남들과는 다른 차별적인 개성과 시스템, 세상이 뭐라 해도 자신들의 특색으로 밀고 나가는 뚝심. 고전게임이 현역일 당시에 쏟아져 나왔던 게임들도 분명히 그랬으리라. 그와 별개로 나 자신은 게임 개발자가 아니었지만 어렸을 적에 게임을 접했던 그 상황과 충격, 무엇보다 '그리움'을 절절하게 느꼈다. (뭐, 과거가 좋았다고 하는 사람은 끝장이라지만 고전게임 시절로 돌아가자는 소리가 아니니까.)
나중에 글을 써서 좀 더 논리적으로 '오만하게' 털어놓을 예정이지만, 이런 나의 개인적인 경험을 토대로 생각해보니 인디 게임을 만드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혹은 몇 번이라도 고전 게임들을 접하고 연구해보길 권한다. 특정 고전게임이 명작이어서 그렇다는, 그런 과거의 유명세에 의존하라는 소리가 아니다. 그 당시의 게임들은 개발 및 플레이 환경이 제한되어 있었기에 '현실적인 이유'로 축소되었지만 오늘날에는 가능한 부분들이 있고, 그 시절에 먹혔다면 오늘날에도 분명히 먹히는 게임성이나 테마 등이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쯤해서 근거나 사례를 들어야 논리가 서겠지. 고전게임을 한창 파고들며 연구하던 시절에, (어디까지나 뇌내망상이지만) '이런 게임들을 합치면 엄청난 물건이 나올 것 같은데' 하고 생각했던 사례가 몇 가지 있다. 그 중에 하나가 이러했다.
- 로드 파이터(코나미, 1984) = 기본 시스템
- 오버탑(SNK, 1996) = 기본 시스템, 시점
- 크레이지 카즈 3 / 람보르기니 아메리칸 챌린지(타이터스 인터랙티브, 1992) = 간편 튜닝, 판돈 걸기
- 스트리트 로드 2(캘리포니아 드림즈, 1991) = 엔진 분해 등 튜닝 묘사, 대결 신청, 판돈 걸기
- 로터스 3: 얼티메이트 챌린지(그렘린 그래픽스, 1992) = 다양한 배경
이 다섯 가지를 합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비슷한 물건이 어느 순간에 나와 있었다. 바로 니드 포 스피드 시리즈(EA, 1994~)였다. 물론 내가 생각한 대로는 아니었고, 정확히는 내가 원했던 부분들이 몇몇 시리즈에 흩어져 있었다. 개발사가 제각각이라서 그런 건지, 세일즈 포인트를 다르게 잡은 건지, 높으신 분들의 입김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전반적으로는 내 생각이 이루어진 셈이었다. (덧붙여 위의 내 생각에 가장 근접한 작품은 니드 포 스피드: 언더그라운드 2(EA, 2004) 혹은 니드 포 스피드: 더 런(EA, 2011)인 것 같다.) 물론 그 사람들이 해당 고전게임에서 모티브를 얻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아마 지금 이 순간에도 고전게임과 비슷한 인디 게임 혹은 모바일 게임들이 제작되고 있을 것이다. 정확히는 내가 그 게임들을 고전게임에 끼워맞추는 격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갖다붙여도 말이 된다는 것은 그만큼 고전게임에 의외로 오늘날에 써먹을 만한 요소가 많다는 사실을 반증하지 않을까. 과연 그 사람들이 게임을 한 번도 안 해보고 그런 아이디어를 내놓았을까. 꼭 게임을 개발하는 측면이 아니더라도, 어렸을 때의 감흥을 찾기 위해 고전게임을 한 번쯤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여태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계속
게임이 문화의 산물이자 문화의 집합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라스트 오브 어스(소니, 2013)가 영화 "시민 케인(1941)"에 비견되고 있다는 점은 하도 언급해대서 내가 말해도 소용이 없을 것 같고, 게임이 다른 대중매체로 발전되거나 그 역의 상황이 발생하는 등 게임은 서서히 문화요소로서 정립해 가고 있다. 높으신 분들의 근시안적인 삽질(!)은 차치하더라도 말이다. 그렇게 몇 번 넘어지기는 하겠지만, 게임은 계속 발전해 나갈 것이다. 쭈-욱.
그러면 나는? 나는 일단 게임 개발자가 아니다. 여기에 '아직은'이라는 말을 붙여야 할지, '엄밀히는'이라는 말을 붙여야 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게임(을 전문으로 번역하길 희망하는) 번역가로서 게임업계에 조금이나마 발을 디디고 있고, 게임에 대한 아이디어가 생각날 때마다 노트에 적거나 SNS에서 떠들어 대고 있다. 상상력 자체는 돈이 되지 않지만 돈이 들지 않고, 입 밖에 내기라도 하면 어디선가 누군가가 실현해 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지분을 요구하지는 못하겠지만, 나의 상상과 아이디어에서 명작이 태어난다면 그건 그것대로 엄청난 일이 아닐까?
확실한 건, 그렇게 되든 안 되든 나는 고전게임을 하고 있을 것 같다. 최근에나 현재에 발매된 게임을 안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도 언젠가는 고전이 될 테니까. 그리고 고전게임도 어느 순간 리메이크가 된다면 현역이 되어 고전 소리를 못 듣겠지. 결국 나는 언제까지고 게이머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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